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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혐수의 뒷동산

대혐수

사랑으로 극복하면 되잖아


  작품은 여기서 보세요 ----> 링크


  브릿G의 작가 프로젝트에 참전?하기 위해 "200자 원고지 200장"요건을 맞춰야 했고, 그 결과 처음 썼던 내용에서 상당히 많이 잘려나갔습니다. 짜임새있는 플롯을 중시한 게 아니라, 이런 저런 인물들에 의해 이런 저런 의견이 표출되는 작품을 기획했다보니 분량이 마구 늘어났다가, 뒤늦게서야 분량제한이 있었다는 걸 알고 허둥지둥 칼질을 시작했다지요.... 


  그렇다고 브릿G에 올린 버전이 더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문장도 더 컴팩트하고 이래저래 더 많이 다듬었으니까요. 단지 좋다 나쁘다의 문제는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롱 버전"을 쓰지 못해 아쉬운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이런 저런 의견들이 표출된다..라는 초기 기획 문제도 있지만, 사실 영상물처럼 소설에도 템포나 지속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롱버전에서는 롱테이크 같은 템포를 추구했었습니다. 덕분에 중언부언하는 측면이 좀 있습니다만 어찌보면 그게 또 자연스러운 흐름 같다고 할지. 큭..브릿G 측에서 분량을 조금만 더 넉넉하게 해주셨다면.


(라고는 하지만, 주어진 제약 내에서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건 그저 제 작가로서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리라는 생각입니다..)


  롱버전에 집착이 좀 있다보니 저에게는 세 가지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1)브릿G에 롱버전도 올린다.

  2)블로그에 롱버전을 올린다.

  3)브릿G버전에서 잘린 내용만 따로 모아 코멘트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롱버전을 올리려면 이래저래 수정작업을 해야 하고, 조금 지친 기분이라 엄두가 안 났습니다. 특히 블로그에다가 롱버전을 올리면, 브릿G에서 숏버전을 보고 오신 분들이 대충 비슷한 내용을 또 봐야하는지라,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3)을 선택했습니다. 작품 진행 순서대로, 잘린 장면 소개와 그 외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도록 해보겠으니, 여기까지 와주신 분들은 찬찬히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작품을 보고 오셨을 터이니 스포일러 경고는 안 해도 되겠지요?




1.미술실

  롱버전에서는 미술실 분위기를 좀 더 이것저것 서술했습니다.


  차분하고 조용한 곳이지만 이곳의 조용함은 학교 어딘가의 활기를 품고 있었다. 미술실의 낡은 의자에 앉아있을 때, 나는 야구부나 검도부, 밴드부 같은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을 활기찬 에너지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것들을 느낄 때, 이 세상은 내가 직접 지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새삼 되새기곤 했다.

   아카사카 나오키는 캔버스 위로 살짝 눈을 들어 올리며 나의 모습을 눈에 담고, 연필을 계속 부지런히 놀린다. 흑연이 종이를 사각사각 훑는 소리가 이 곳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소리. 무거운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 있다.



  분위기 연출도 그렇지만, 인간은 결국 제한된 시야 안에서만 세상을 볼 수 있을 뿐, 내가 지각하지 못하는 잠재적인 것이 있다...라는 메시지를 미리 깔아두려고 넣었던 내용입니다. 그래봤자 칼질.



2.프라모델부

  잘려나간 내용 대부분이 "대체역사소설 요소"였습니다. 프라모델부 장면은 살아남은 "대체역사소설 요소"입니다. 이것마저 잘리면, 세계관을 설명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물론 문제가 있습니다.


  애초에 프라모델부가 있는 고등학교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지간한 대학에도 없을 것 같은데요=_=;;;). 단지 야마토함이 침몰하지 않았다, 라는 사실을 나름대로 임팩트있게 보여줄 의도로 "프라모델부"라는 다소 억지 설정을 강행했습니다.


  그 덕에 밀리터리+프라모델 덕후를 혐오 성향이 있는 인물로 묘사해버렸는데, 그야말로 언피씨한 것 아니냐는 죄책감이 있습니다. 혹시 소설을 읽고 불쾌하셨을 독자님이 계신다면 이 자리에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3.불안해진 일본사회

  프라모델부에서 마리코 커플이 대패한 직후 장면입니다. 이 부분 역시 대체역사소설 요소이기도 했는데,  잘려나가서 아쉬운 장면 중 하나입니다.


  작중 세계에서는 당연히 삼성이 없기 때문에, 소니가 삼성을 대신하여 애플과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 제품의 경쟁력이 약해지면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죠.


  일본은 버블 붕괴를 아직도 수습하지 못한 가운데, 중국이 압도적인 인구수를 바탕으로 미국을 넘보는 강대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7, 80년대 황금기를 이끌었던 일본 기업들은 세계 넘버원의 자리를 하나 하나 내어주고 있다. 얼마 전에 내지에서는 무시무시한 지진해일로 원자력 발전소가 파괴되어 방사능이 유출되는 사건도 있었고, 사회 원로라는 아저씨들은 신세대 일본인들이 패기와 욕망이 없다며 규탄했다. 청소년들은 청소년 보호법 뒤에 숨어 비행을 저지르고 학생인권을 내세워 교권을 추락시키는 불량아 취급을 받았다. 모두가 비난 대상만 찾아다니는 듯 한 세태. 설명하기 가장 쉬운 건 자신감의 손상이 아닐까.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권리를 요구하려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까? 아니었으면 좋겠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다.

  

  이런 어지러운 시기 조선인들은 일본사회에 변화를 요구했다. 반성하라. 배상하라. 그 요구는 작게는 일상생활의 편견부터 크게는 독립까지 넓게 펼쳐져 있었다. 반면 일본인들에게 일상이란 안온하고 소중한 것이었다. 요즘 흥행하는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처럼. 그 대척점에서, 조선인들은 이전까지 당연했던 일상을 잘못으로 규정하고 비판했다.

 

   즉 지금의 싸움은 내가 보기에, 일상을 지키려는 자들과 일상을 엎으려는 자들의 대결로 보였다. 그러나 나는 소니 핸드폰이 있는 일상이 사라진다는 게 조금 두렵게 느껴졌다. 내 스마트폰이 소니가 아니라 샤오미로 바뀐다고 생각하면 왠지 생리적으로거북했다. 싸우는 조선인들은 나와 달리 일상의 파괴가 두렵지 않은 걸까? 하지만 조선인들 때문에 일상이 무너진다면 온 세상이 조선인들을 비난할 것만 같았다. 실제로 일본인들은 그런 식으로 조선인들을 비난했다. 사회를 분열시켜 위기를 극복할 단결력을 약화시킨다. 중국이 일본 기업들을 앞지르려고 한다. 등등.


  일본의 위기감으로 인해 의견표출이 억제되는 상황을 묘사했습니다. 한편 신카이 마코토의 대히트와 후쿠시마 해일 같은 사건은 실제 역사대로 이루어졌죠.

  그러나 사실 제가 제일 아쉬워하는 건, 소니가 샤오미로 대체되는 것이 싫다는 마리코의 심리묘사입니다. 일본에 의한 일상에 지배되고 있는 주인공의 면모를 묘사하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사실 여기서도 마리코가 샤오미 운운하는 것이 앞뒤 내용과 잘 호응되는 것은 아니죠. 조선인이 권리를 주장한다고 소니가 샤오미로 바뀌나? 아무 상관이 없죠. 그래도 일상이 뒤바뀌는 데 대한 마리코의 두려움을 묘사한 대목인지라, 어떻게는 살려보려 했으나 실패.



4.80년대 이후 일본의 변화

   요시노는 마리코와의 대화에서, 일본은 80년대 이후로 태도를 바꾸었고, 그러므로 조선인들도 마음을 열어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80년대 이후라는 것도 대체역사소설 요소였고, 가차없이 잘려나갔습니다.


  “부장은 그럼 일본인이 용서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 그럼요.”

 

  그가 힘있게 긍정했다. 글쎄. 일본인은 용서받을 것이 없다, 라고 말하는 것 보다는 나을까?

 

  “6월 광주 만세사태와 5·18 소요사태(대한민국이 독립하지 못하면서, 원래대로였다면 광주에서 일어났어야 했을 민주화 운동 대신 대한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물론 일본은 이들 사건에다 의의를 절하하는 명칭을 부여했다) 이후 일본도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이젠 조선인 특권이니 역차별이니 하는 논란이 날 정도로요. 조선인들에게 충분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 진심만큼은 이해받고 싶다는 게 일본인으로서의 솔직한 심정이랄까요.”

  

  충분하지 않은데 진심을 알아달라는 것은 일방적인 요구일 뿐이다.



  하늘색 괄호는 주석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아무튼, 한국인들의 민주적 운동이 "사태"같은 식으로 교육되고 있다는 점을 묘사하는 대목이었습니다.



5.나오키 출생의 비밀

  마리코가 나오키와 함께 귀가하는 장면에서, 나오키가 출생의 비밀을 말합니다. 이 부분도 대체역사소설 요소입니다.


  “이 기회에 마리코, 너에게 내 비밀을 알려줄게.”

  

  “비밀? 나한테 숨기는 게 있었어?”


  “. 실은 나, 조선인의 피가 흘러.”


  “? 정말?”


  “. 조상님이 태합의 조선정벌전(※임진왜란)때 귀화한 조선인 도공이셔. 최근 일들 때문인지 그 분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어. 조국을 등지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어떤 마음이셨을까?”

 

   나는 나오키가 도자기를 만드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어울리는 이미지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이건 변명의 여지없이 딴 생각이었다. 다시 나오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 그래서 나오키는 어떻게 생각해?”


  “잘 모르겠어. 내가 조선인이라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는다는 것만은 확실해. 조선인 조상님을 생각할 때마다 어색한 위화감만 들어.”


  나오키는 걸음을 멈추고 내 쪽으로 돌아섰다.


  “미안해 마리코. 내가 전적으로 네 편인지 자신이 없어. 언젠가 어떤 식으로 널 실망시키고, 심지어 배신하게 될지 알 수 없어. 예를 들어 조선인들이 대대적으로 일어나서 독립을 주장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게 내 일상을 위협한다고 느꼈을 때에도 나는 네 편이 되어줄 수 있을까? 조선인들이 요구라고 말하는 걸 일본인들이 혐일이라고 말할 때, 나는 전적으로 어느 쪽의 편이 되어주지 못해. 조선인들을 위해 어느 선까지 물러서줘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

 

   그치만 그거, 내심 조선인들의 요구가 옳다고, 조선인들의 요구를 그저 혐오로 치부해버리진 않는단 뜻 아냐?”


  내가 위로해주는 웃음을 지어주며 말했다. 나오키는 내 시선을 피했다.


  “잘 모르겠어. 어쩌면 그게 나와 요시노의 생각이 갈리는 지점일 것 같아. 아무래도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서는 무력해져버리는 순간이 생길 거야.”


  마음이 무거워진다. 나오키의 말에 동의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하늘색 괄호는 주석처리하려고 했던 부분입니다.


  이 내용은 학교에서 임진왜란을 "태합의 조선정벌전"이름으로 가르친다는 점을 알려주는 대체역사소설 요소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소설 중후반부에 일어날 일을 예고하는 장면이기도 했죠. 그러나 이 대목만 뚝 떼어놓으면 그럴싸해보이는데, 소설 전체에서 보면 앞뒤 내용과 호응이 잘 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역시 어떻게든 살려보려 했으나, 200자 원고지 200장의 압박 때문에 결국 잘렸습니다.


 

6.마리코의 동생

  마리코의 동생은 엄청난 칼질의 희생양입니다. 브릿G버전에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습니다만, 롱버전에서는 꽤나 묵직했죠.


  

  루미코의 방은 단단히 닫혀있었다. 날 거부한다는 메시지가 확실히 전해졌다.


  “루미코.”


  이름을 부르며 살살 노크해본다. 문은 벌커덕 열렸다. 깜짝 놀라 물러선 나를 루미코의 노려보는 눈이 맞이해주었다. 그리고 루미코는 내 귀에 어색하게 들리는 말을 중얼거렸다. 소은 어쩌고 하는 그 말은 조선어였다.


  “, 뭐라고?”


  “김소은. 루미코가 아니야.”


  루미코가, 아니, 소은이가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일본어로 말했다.


  “무슨 일인데.”


  “, 혹시 우리 학교에 대자보 사건 있었던 거 알아?”


  “알지. 우리 학교가 먼저 했었는데.”


  “, 그래? 그랬구나. , 혹시 너는괜찮니?”


  입술이 쫙쫙 마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소은이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아, 뭔가 있구나 하고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건데?”


  역시 무슨 일이 있구나. 소은이는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자 위협일 것이다. 별 수 없다. 바로 들어가야지.


  “괴롭힘 같은 거 당하니?”


  “언니 학교에도 있는 거지? 혐일하는 춍이라면서 괴롭힘당하는 한국 학생들이.”


  “한국?”


  내가 되묻지만, 소은이는 경멸스럽다는 듯 피식 비웃고는


  “괴롭힘 당하는 애들 있지? 왜놈들 학생회에 빌붙어있는 언니가 그 괴롭힘 당하는 애들 지켜줬어?”


  “


  “물론 겁나서 아무것도 못 했겠지. 그런 주제에 날 위해선 뭘 해줄 수 있어? 왜놈들한테 예쁨 받으려고 혈안인 주제에.”


  “너 내가 나오키랑 사귄다고 그렇게 말 하는 거야?”


  나도 더 참지 못하고 울컥 치밀어오른 화를 내뱉었다.


  “걱정해서 물어본 거잖아! 그리고 나오키는 좋은 애야! 조선인들도 동등하게 생각해준다고!”


  “동등하게 생각해주는 게 뭐가 좋은 애야? 한국인이건 왜놈이건 타인을 동등하게 대해주는 건 당연한 거야. 고마울 이유가 하나도 없어. 그게 고마우면 대체 식민사상에 얼마나 쩌든 거야? 그러니 내가 부역자라고 안 하고 배겨?”


  “, 뭐라고?”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 다리가 후들거린다.


  “언니 걱정은 필요 없어. 내 편이 되어주는 진짜 친구들은 따로 있으니까.”


  “, 잠깐, 너 그 말은 - ”


  그러나 내가 더 물어보기 전에 소은이는 문을 쾅 닫아버렸다. 눈물을 쏟는 건 오늘로 벌써 두 번째다. 딱히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매도당하는 건 정말 견디기 너무 힘들다. 누구한테 우는 얼굴을 들키기 전에 후다닥 내 방으로 돌아갔다. 소은이의 말이 저주처럼 맴돌아서, 아무래도 나오키에게 연락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소은이는 조선인과 조선인의 갈등을 표현하기 위한 캐릭터였는데, 선율이가 어느정도 그 역할을 해준다는 판단하에 날려버렸습니다. 보다시피 소은이와의 장면이 꽤 분량이 되는데, 이걸 남길 경우 200장에 맞추기가 너무 힘들었거든요.


  이후 마리코가 선율이에게 "나는 동생에게도 미움받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소은이와의 장면이 삭제되는 바람에 그 무게감이 약해진 건 아닌지 마음에 걸립니다.



7.마리코의 애정표현

  이건 삭제된 내용에 대한 언급은 아닙니다. 어쨌든 작중 마리코는 상당히 소심한 인물인데, 애정표현만큼은 엄청 과감하죠.


  소심해보이지만 내면에 강렬한 불꽃이 있다는...것입니다... 고 하고는 싶은데 잘 한 짓인지 잘 모르겠네요.



8.유이의 주장

  유이가 마리코에게 하는 발언도 대거 잘려나갔습니다. 니시오카의 발언과 중복된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니시오카가 했던 말을 지운 덕분에 콤팩트해지기는 했으나,  "깐 데 또 까는" 집요함은 줄어들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니시오카의 발언과 중복이라는 판단에 잘린 내용은 이렇습니다.


  “분명 나처럼 속상해하는 일본인들이 많은 거야. 자꾸 악당취급 받으니까. 게다가 조선인들이 당한 이런저런 사회문제가 자꾸 이슈화되는데, 아무래도 요즘은 신문도 방송도 조선인 편드는 게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나봐. 일본인들은 뭐 호화생활하나? 일본인들도 어려운 점 많아. 단지 일본의 고질적인 사회문제들이 있을 뿐인데, 왜 자꾸 조선인 일본인 편 갈라서 세상을 보지? 덕분에 소모적인 감정싸움만 하고 실질적인 문제해결은 못 하잖아. 이해가 안 가.”


 

  사실 조금 늬앙스는 다르긴 합니다. 유이의 위 발언은 이른바 "중립 위치에서 합리적인 발언 하기" 인 것이죠.


  잘려나간 내용 중에는 대체역사소설 요소도 있습니다. 유이와 마리코가 본 영화와 관련되어 나옵니다.


  유이와 나는 맥도날드에 마주앉아 조금 늦은 점심을 먹는다. 두시 반이 넘어서야 점심을 먹는 건 함께 영화를 봤기 때문이었다. 학생회 회의에서의 일로 기운이 빠져있던 터에 유이가 영화를 보자며 연락했고, 옳다구나 하고 나온 것이다.


  “영화 재밌었지? ! ! 쾅쾅 때려부수고.”


  유이가 들떠서 말했다. 유이는 이 헐리우드 영화 시리즈의 열혈 팬이었다. 그리고 유이는,


  “주인공이 독재자를 무찔러서 핍박받는 행성을 구한 거 말야. 어쩐지 민비 살해사건생각났지?”


  유이는, 내가 조선인이란 걸 별로 신경쓰지 않고 말한다. 확실히 영화의 독재자가 외계 군대를 불러서 자국 혁명군을 공격한 건 민비와 비슷하긴 했다. 그치만 그래도 그렇지. 교과서에서는 이쪽도 나빴고 저쪽도 나빴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내용인데.


  “난 뛰어난 사람이 대중들을 이끌어주는 이야기가 좋아. 올바른 사람이 이끌어준다면 말야, 인정하고 복종해도 괜찮을 거 같거든.”

 

   유이의 그 관점이 유별난 건 아니리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훌륭한 주군과 충성을 다 하는 가신들의 이야기는 늘 대인기였다.


  “아이 참, 마리짱 무슨 걱정 있어? 내내 표정이 어둡잖아?”


  표정이 어두운 건 영화 탓도 있었다. 독재자의 사악한 통치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인 대중들 앞에 이방인 주인공이 나타나고, 그 무기력한 대중을 각성시켜 구원해내는 스토리라인이 불편했던 것이다. 유이가 민비 살해사건을 떠올렸던 바로 그 스토리라인 말이다.

 

  정말로 조선인들은 일본의 보호가 아니었다면 서구열강에게 수탈을 당하기만 했을까? 일단 학교에서는 그렇게 배웠다. 정말 100년 전 조선인들은, 주인공이 와서 멋있는 연설을 하기 전 까지는 무기력했던 영화 속 행성 원주민들과 같은 모습이었을까?


  스토리라인이 불편했음에도 영화의 현란한 연출과 액션 때문에 흠뻑 몰입해서 봤다는 것도 이제 와서 날 울적하게 했다.

 

  이견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저는 실제로 명성황후 민씨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하지만 침략자 입장인 일본인이 저런 말을 하면 기분이 매우 나쁠 것 같다...는 생각에 써 본 장면입니다.


  또한 이 장면은 상대 입장은 배려하지 않고 막 말해도 되는, 식민지인과 피식민지인의 권력차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학생회장 키쿠타가 맡은 부분이기도 해서, 잘랐습니다.


  아무튼 이 장면이 잘린 탓에, 영화에 대해 선율과 대화하는 대목도 덩달아 날아갔습니다.


  약속 시간 전에 영화나 한 편 보려고 했을 뿐이에요. 당신이랑 마주칠 줄을 몰랐을 뿐.”


  “그랬군요. 영화 어땠어요?”


  “불쾌했어요.”


  역시. 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또 하나 잘린 것은, 유이와 마리코가 친해진 계기에 대한 대화입니다.


  미안. 내가 너무 무거운 이야길 해버렸다 그치? 안 그래도 침울해있는데.”


  내가 조선인 차별을 자각하기 전부터 유이와의 추억을 쌓아온 탓일까, 나는 유이를 미워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하나 더. 요즘 일본인과 조선인이 으르렁거리고 있지만, 우리 둘을 생각하면 난 희망이 생겨. , 우리도 처음 만남은 말다툼이었잖아.”


  유이가 키득거렸다. 나도 미소를 짓는다.


  “에어컨 온도 때문이었지.”


  “되게 사소한 일이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대판 싸웠어. 그지? 그치만 우리 지금은 잘 지내잖아. 마리코도 다른 조선 애들하고는 달리 이상한 말도 안 하고.”


  사소한 일. 하지만 최근 들어서 그 때 일을 돌이킬 때, 어쩌면 내가 조선인이라 그런 시비가 붙었을지 모른다고 느끼는 걸 유이는 알까? 이게 유이가 말한 피해의식일까? 에어컨 온도 때문에 말다툼을 했던 그 때에도, 유이는 피해의식에 쩔은 조선년이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그러나 이런 의혹들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난 유이와 절교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건 유이 말대로 희망적인 걸까? 아니면 오히려 절망적인 걸까?


  잘려나가서 너무 아쉬운 대화 중 하나입니다. 소위 "빨간 약"을 먹은 뒤 세계관이 바뀌고 있는 마리코 / 거기에 저항하려 하는 마리코에 대한 묘사니까요. 또, 순종적인 조선인을 호의적으로 보는 일본인의 태도도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이의 대사 상당량을 날려버리고나니 남겨놓기 애매해진 대목이라 결국 잘렸습니다. 그리고 이거 안 잘랐으면 200장 못 맞춰요..


  생각해보니 이 대목이 남아있었다면 나오키를 용서해버리는 마리코의 결정을 좀 더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는 근거가 됐을 텐데 아쉽네용.



8.소은이의 논쟁

  원래는, 귀가중인 마리코가 마주친 소은이의 논쟁도 더 긴 묘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롱버전에서 어거지로 썼던 장면이기도 해서, 잘린 게 딱히 마음에 걸리지는 않습니다.



9.목욕에 대하여

  나오키에게 전화하기 직전, 마리코가 목욕에 대해 생각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늘 그렇듯 침묵으로 일관된 가족 저녁식사가 끝나고, 목욕까지 마친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내일 수업을 준비했다. 마음은 여전히 무겁지만 목욕은 몸을 조금 가뿐하게 해주었다.

  이번에 헌터행위 사례들을 살펴보다가, 일본이 그리 싫으면 일본 문화인 목욕도 하지 말라는 비아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소은이가 이런 말에는 어떻게 반론할지 궁금했다. 물론 소은이한테는 물어보지 못할 테고, 나중에 선율한테나 물어봐야겠다.


  저는 이런 내용이 세계관의 디테일을 살려준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200쪽에 맞추려면 잘라야 했습니다. 사실 앞뒤 내용에 비춰보면 제 취향 때문에 억지로 끼워넣었다는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10.키쿠타의 축제에 대한 기대

  원래 키쿠타와 마리코의 마지막 대화도 분량이 좀 더 있었습니다만, 잘렸습니다. 잘려서 아쉬운 대목 중 거의 탑급인데, 왜냐하면 작품의 주요 고민거리와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만능열쇠인가?


사상의 자유는 물론 중요해. 하지만 이번 축제에서는 그들도 참아야 해. 주변을 둘러봐. 이번 축제를 위해 모두가 애쓰고 있어. 그들 입장은 생각하지 않아? 정치적인 행동 때문에 축제가 오염되었을 때 저 사람들 심정은 어떻겠어?”


  그 말에 나는 조금 흠칫했다. 학생회장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혹시 2차 세계대전 중 어느 크리스마스날, 참호에서 대치하고 있던 영국군과 독일군이 아무런 약속도 없이 싸움을 멈추고, 함께 축구를 했다는 사건을 아니? 나는 이번 축제가 그런 기적을 일으켰으면 해. 일본인과 조선인의 감정이 깊어지는 지금, 우리가 서로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을, 그 가능성을 알 수 있길 바라는 거야.”


  “그건, 정말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지금껏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오기도 했고요. 하지만 키쿠타상. 그 크리스마스가 끝나자마자 두 나라 군인들은 다시 총질을 시작했어요. 잠시의 망각이 해소해줄 수 있는 갈등은 없어요. 더군다나 학생회는 헌터행위를 제지해달라는 제 요청을 그저 흘려버렸어요.”


  키쿠타가 이번 축제를 통해 한국학생과 일본 학생의 갈등을 치우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선한 마음이 일으키는 한 방의 기적...에 대한 회의감이 작품의 메인 테마였기 때문에, 이 대목이 날아간 건 정말 뼈가 아픕니다.



11.마리코의 키스

  제가 이 소설을 쓰며 내린 결정 중 제일 회의감이 드는 부분입니다. 마리코가 나오키를 용서하는 게 너무 작위적이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둘이 결별하는 순간에 나오키가 엄청나게 찌질하니까요.


  그러나 제가 이 마지막 대목을 쓸 때, 《교향시편 유레카 세븐》의 OST를 들으며 썼기 때문에 사랑의 힘 뽕에 가득찼었던고로....


  사실 여주와 남주가 꼭 잘 되어야만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세상입니다. 오히려 《비긴 어게인》처럼 결별하는 결말에 더 큰 호응이 이끌어지기도 하죠. 나도 그렇게 할까...했지만.


  음, 여전히 이 결말은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