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후감상

"키코의 세계" 후기 첫 버전

영선(대혐수) 2024. 9. 1. 13:01

키코의 세계에 적힌 후기 글은 두 번째 버전입니다. 처음 쓴 버전은 따로 있어요.

 

그러나 부연설명이 많이 필요한 글 내용에 비해 주어진 공간은 많지 않아서 지금 버전의 후기가 새로 작성되었습니다. 첫 버전의 후기가 다소 어둡고 무거웠던 걸 감안하면 출판용으로는 지금 쪽이 좋았다고는 생각하지만요..

 

그러나 첫 버전의 후기는 지금 저를 사로잡은 화두 같은 것이어서... 공유해보기로 했습니다.

 

여기 올린 글은 원래 작성했던 원고를 수정하고 보충한 것입니다.

 


 

 

저는 운이 좋아서 많은 혜택을 받고 자랐습니다. 어려서부터 이야기를 만드는 직업을 갖고 싶었는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꿈을 좌절시키는 불우한 일을 겪지 않았거든요. 당장 내일 먹을 밥이 없거나, 가족 중에 누가 너무 아파서 많은 병원비를 내야 하거나, 부모님이 안전하지 못한 직장에서 일하시다가 사고로 다치는 일도 없었습니다. 우연히 서울에서 남자로 태어난 덕분에 안전을 위협당하는 일도 별로 없었습니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갈 때 신체장애가 걸림돌이 되는 일도 없었습니다. 생활이 여유로운 덕분인지 부모님은 제게 글쓰기 같은 건 집어치우고 빨리 취직해서 돈을 벌어오라며 윽박지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꿈을 응원하며 헌신하고 희생해 주셨습니다. 이것 중에서 제가 노력해서 얻은 것은 딱히 없습니다.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저와 같은 행운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저보다 글을 더 잘 쓰고, 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정말 많겠지만, 그중 어떤 사람들은 운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꿈을 포기해야 했을 것입니다. 전쟁이 일상인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저는 작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 책을 읽는 어린이 여러분 모두가 저처럼 운이 좋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할 수도 있을 거예요. 어쩌면 어린이라는 이유만으로 불공평한 일을 겪었을지도 모르겠고요. 어린이는 출입 금지라면서 멋진 가게에서 쫓겨난 적은 없나요? 그런 일을 겪지 않았기를 바라지만…

루나와 키코, 그리고 안드로마케의 모험은 이런 고민에서 태어난 이야기입니다. 루나는 저처럼 많은 혜택을 받은 어린이입니다. 운 좋게도 사촌오빠 서환은 안드로마케를 만드는 굉장한 기술자이고, 덕분에 루나는 안드로마케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거기다 서환은 우림이가 올바른 마음가짐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어른이기도 합니다. 이야기에서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루나네 가족도 제 가족처럼 여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 노력 없이 행운을 누린 저와 닮았지요? 이야기 내내 루나가 고민에 빠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저와 함께 같은 고민에 빠져 있는 것이죠.

틈월드에서도,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도, 누군가를 괴롭히는 불공평은 잘 감추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누리는 혜택은 누군가가 겪는 불공평 덕분이니까요. 저는 어렵고 위험한 일을 절박한 사람에게 떠넘기고, 동식물의 터전을 빼앗아 편리하게 생활합니다. 그래서 저는 부끄럽습니다. 

 

루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루나는 좋은 환경에서 틈월드를 마냥 즐길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것은 비티들을 착취하는 구조 속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묻지도 않고 산빈을 세버렌으로 바꾸어 편리하게 이용하듯이. 

 

작가인 저는 루나의 행동 동기가 이러한 상황인식에서 오는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처럼 운이 좋은 사람은 어쩌면 좋을까요? 부끄러워하기만 하지 않고, 좀 더 떳떳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 가득한 소설 한 권을 썼지만,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외면하지 않고 고민을 이어가 보려고 해요.